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9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모후 [[카스티야의 블랑카]]가 [[섭정]]을 했으나 친정을 한 이후에는 '''[[중세시대]]의 완벽한 왕'''으로 칭송받았다. 감찰관을 파견하여 행정관을 감독했고, [[프랑스 파리|파리]]에 항구적인 법정인 [[고등법원(프랑스)|고등법원]]을 설치했다. 여기서 정당한 재판을 위해 [[결투 재판]]을 금지하고, [[무죄추정의 원칙]]을 도입했다.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으며, [[서유럽]]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다. 특히 루이 9세는 스스로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에 공감했기에 금욕과 청빈, 자선을 직접 실행했다. 복장과 식사에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청빈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,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등 중세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.[* 이 부분은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2852055&cid=56790&categoryId=56791|네이버 지식백과]]를 출처로 했다.] 신앙심이 깊은 나머지 [[십자군 전쟁]]에 지나칠 정도의 열정을 쏟았는데 1248년 참가한 제7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동생 하나를 잃고, 그 이듬해에 [[포로]]가 되었으며, 1270년 제8차 십자군 전쟁 때는 아들 하나를 잃고, [[튀니스]]에서 병사하고 말았다.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시신을 삶아 살은 발라내고 뼈만 골라내어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. 국외에서 참가한 십자군 원정은 성과가 없었지만, 내치는 성공해서 파리에 [[파리 대학교]]를 세웠으며 [[알비 십자군]]에 참가해 남프랑스에 뿌리내렸던 이단인 [[카타리파]]를 소탕했다.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성공했지만 아직 카타리파 잔당이 남아 있었는데, 루이 9세 때 잔당을 소탕하면서 14세기에 카타리파는 소멸했다. 이 과정에서 남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카페 왕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. 즉, 루이 9세는 개인으로서는 신심이 깊은 인물이었고, 왕으로서는 통치 [[이데올로기]]로 [[그리스도교]]식 도덕 군주를 내세워 신념에 따른 통치에 성공했으며, 세속적으로는 [[부국강병]]을 이루었기에, 당대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여줘야한다고 여겨지던 덕목들을 모두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.[* 종교적인 수사법을 쓰지 않더라도, 가장 성공한 [[정치인]]이란 '''정치적 이득'''과 '''신념'''과 '''국가의 번영'''이 일치하는 유형이다. 루이 9세는 이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'''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'''라 불린 것이다.] [[카페 왕조]]의 국왕이었기에 [[발루아 왕조]]와 [[부르봉 왕조]]의 공동 시조에 해당하기도 한다. '''발루아'''와 '''부르봉''' 모두 카페 왕조 출신의 인물들이 소유했던 영지의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. 그것도《[[살리카법]]》에 적용되지도 않는 부계 후손들이다. [[한국]], [[중국]]을 비롯한 [[동아시아]] 개념에선 다 한 가문, 한 왕조인 셈이다. 루이 9세의 자식들에게서 카페 왕조와 부르봉 왕조로 나누어졌다. 그의 차남 [[필리프 3세]]는 카페 왕조의 왕이 되었고, 막내 아들이자 6남 로베르는 클레르몽 백작이 되었는데, 그 로베르가 부르봉-라르샹보(Bourbon-l'Archambault) 시(市)를 포함한 부르봉 지역을 상속받은 카페-부르고뉴 가문의 베아트리스[* 할아버지가 부르고뉴 공작이었으며 아버지가 공작의 차남(실질적으로는 장남)이었다.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부르고뉴 공작위는 베아트리스의 작은 아버지에게 돌아갔다. [[대체역사|만약 베아트리스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정상적으로 작위를 물려받았다면 베아트리스와 결혼한 로베르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을 것이고, 그들의 장남인 루이 1세 드 부르봉 공작의 후손들이 부르봉 왕조가 아닌 부르고뉴 왕조를 개창했을 것이다.]] 당연히 그 유명한 [[부르고뉴국|발루아-부르고뉴 가문]] 역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, 더 나아가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아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.]와 결혼하여 부르봉 가문을 개창했고, 그들의 아들인 루이[* 1327년, 부르봉 공작에 임명되었다.]의 먼 후손인 [[앙리 4세|앙리 드 부르봉]]이 부르봉 왕조를 창건했다. 더불어 자신의 후계자였던 필리프 3세의 막내아들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 [[필리프 6세]]는 발루아 왕조를 창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